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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차 로그 #오늘의_태비

레샤 2023. 1. 15. 15:44

차터홀. 스크리브너스 가는 남북 방향의 직선대로인 제국로에서 한 블록 동쪽에 있는 길목이다. 강으로 나눠진 차터홀 북시가지나 브라이트스톤, 또는 화이트크라운에서 오는 이들에게 그곳은 지상열차 상급법원 정거장에서 차터홀 대학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지만 변덕스럽고 난폭한 언덕의 경사 때문에 보행자에게는 피하고 싶은 길로 여겨진다. 그 기피는 마차를 타는 이들, 그러니까 귀족이나 제국 고위공무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고행을 요구하는 신을 모시지도 않거니와 본격적인 굴곡이 시작되기 전 몸풀기 정도의 가벼운 내리막길에 있는 도스크볼상급법원에서 주로 발걸음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차터홀 대학까지 향하려면 여행자는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마차가 제공하는 편의와 권위를 내려놓고 지팡이를 챙겨야만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체면을 아끼지 않는 이는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나 다른 도시에서 온 관광객 뿐이다. 그 밖의 이유로 이 경사를 거스르려는 이에게 스크리브너스 가는 빠짐없이 굴욕을 선사했다. 그러나 최근 대학을 자주 찾는 북시가지의 손님들은 귀족도 아니요 의전을 받는 공무원도 아닌 데다가 신입생도 관광객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스크리브너스 가는 레지스탕스의 바리케이드가 지난 일 년 동안 철수되지 않은 요새였다.

제국로에서 차터홀로 진군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길인 달모어 가는 지상열차 정거장과 바로 붙어 있는 데다가 대학 건너편에 모여 살면서 소란을 꺼려하는 은행가들의 입김 때문에 푸른 코트가 진을 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국로에서 대학으로 향하기 위해 푸른 코트 경비대는 폭이 좁고 낡은 다리를 건너야 했고, 다리 건너에는 나이트마켓에서 유통되는 화이트홀로우산 불법 폭약물을 실험해보고 싶어하는 반항아들이 포진해 있었기에 그다지 좋은 전장은 못 되었다.

그러나 지형이 제공하는 전략적 유리함은 그 지역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이 때문에 스크리브너스 가에서의 교착 상태는 밀리차에게 무거운 근심이었다. 밀리차가 이제 더 이상 유령학부의 '요정'이 아닌 한 명의 저항가로서 도스크볼에 돌아왔을 때부터 서서히 꺼져가는 도시의 등불을 바다가 영원히 식멸하려 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교착 전선은 북시가지에 주둔하고 있는 음침한 감령관들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일을 그저 꿈꿀 수 있을 뿐이었다.

밀리차의 눈에 비친 이 전선은 제국 제2의 도시에 포진한 야만적인 기마경찰과 판갑으로 된 음산함을 두른 영술사를 상대로 억압 받는 시민이 거둔 승리가 아니었다. 실크 강 지류를 해자처럼 두른 차터홀 대학은 보루가 아니라 독방이었으며, 그것도 간수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집행일을 망각한 순진한 사형수들의 낙원이었다. 그곳에는 푸른 코트와 감령관들에게 '몰이 사냥'을 당한 노동자들과 음모꾼, 일부 학생들과 소수의 교수들, 도박꾼과 노숙자, 고용된 유령사, 기자, 그리고 밀정이 섞여 있다.

문제는 이것이 진실로 권력의 무관심인지 아니면 잘 계산된 악의인지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푸른 코트가 화이트홀로우에서 수입한 '신형 무기'를 시가지에 끌고 나왔을 때에는 이 내전이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 형체 없는 화포는 콜릿지의 노동자 쟁의를 처부수고 차터홀을 지나쳐 서쪽 차홀로우로 진군했으며, 감령관들의 진격은 스크리브너스를 제외한 차터홀 시가지의 모든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멈추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듯이.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밀리차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돌이킬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는 공평한 재앙이 상륙하고 있었다. 그것의 소리 없는 도래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선이 밀릴 때에도 개선의 행진이 눈에 선할 때에도, 밀리차는 불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러나 밀리차는 푸른 코트의 배후에 있는 총독의 의도에 대해서도, 그 감령관의 불길한 검은 갑주 아래에 있을 얼굴에 대해서도, 그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싸웠다. 그러면 그것을 막을 힘이 없어서? 그럴 지 모른다. 그러나 밀리차는 단 한 번도 이기기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 경험 없는 무구한 학생들이 섞인 소대일지언정 밀리차가 이끄는 곳에는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야 했을 지라도 삶이 있었다. 그러면 아무도 알아줄 수 없어서? 어쩌면 그것이 밀리차의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 평정의 수면에 비치는 본심일 지 모른다. 그러나 밀리차는 그것을 긍정해본 적이 없다.

이 재앙이 모두에게 알려진다면 스크리브너스의 굳건한 마지막 전선이 무너질 것이라 밀리차는 생각했다. 공평한 죽음. 이 도시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온전한 한 사람 몫의 값도 가지지 못한다.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날 수 없다면 재앙은 불평등을 익사시키는 천사가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몽상가도 있을 테다.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지금껏 치러온 희생이 허무하게 돌아가리라 탄식하며 그 손에서 횃불을, 창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마지막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교착 전선을 넘어 벨웨더로 향하자고 연설을 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따를 것이다.

밀리차는 이들의 투지가 두려웠던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두려워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모순된 마음에 하늘의 것인지 바다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별빛이 비추었다.

 

*

 

"밀리, 무슨 생각해?"

 

그때, 엄숙한 나무 문을 열고 구름 같은 목소리와 함께 에멜린이 들어왔다. 에멜린 스트랭포드.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밀리차를 감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아."

 

밀리차의 짧은 탄식과 긴 침묵 끝에 에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예전에 말했던 그 사람들 말이야, 밀리."

"응, 뭐 소식이 있어?"

"소식보다는 뜬소문이지만, 벨웨더에 한 명이 잡혀 있다나 봐."

"뭐? 언제? 어디서 잡혔대? 그 사람이 맞아?"

 

밀리차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도스크볼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얻은 버릇이다.

 

"쉿. 질문은 한 번에 한 개씩만 하세요, 밀리 학생."

"...미안."

"며칠 전에, 벨웨더에 잠입한 사람이 있었다나봐. 감령관들은 어떤 유령사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마침 자기네들 소굴로 걸어 들어온 기회를 잡은 거지."

"...응. 그래서?"

"참, 이 얘기가 어디서 나왔냐면... 모로초프 씨가 밤 당직을 하려고 포스턴 브릿지 일대를 순찰하는데 그림자 속에서 어떤 말하는 기계 고양이가 나타난 거야. 그 장면을 마침 공기를 쐬어 나온 티모스가 보고 있었고."

"티모스 그 자식, 결국 모로초프한테 붙은 건가."

"후후, 티모스는 편을 가려서 여기저기 붙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니까."

"흥, 그건 모르지. 그래서?"

 

밀리차가 에멜린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에멜린은 그 '기계 고양이'가 모로초프에게 했다는 말을 티모스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략 재구성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곧 부자연스러운 중단을 맞이해야 했다.

 

"잠깐, 어디 가? 밀리?"

"티모스 그 자식, 아까 근처에서 본 것 같아. 얘기를 자세히 들어봐야겠어."

 

밀리차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때 유령학부 교수의 연구실이었던 곳을 나왔다.

 

"밀, ...기다려...!"

 

에멜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초조해졌다. 에멜린은 아직 체온과 동화되지 못한 의자를 박차고 나가 밀리차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쯤 달리고 있던 밀리차를 멈춰 세우기 위해 에멜린은 힘 주어 밀리차를 당겼고, 반동에 의해 곧 반쯤 무너진 자세로 벽에 등을 기대어 밀리차를 마주했다, 아니, 눈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메...?"

 

홀의 공기는 차게 식어 있었고, 밀리차는 에멜린이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나, 그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에멜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밀리차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답을 해야 했다. 침묵이 두려웠기에. 목소리에는 당혹이 묻어 나왔다.

 

"그, 그럼..."

"나,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서 널 찾은 거야."

"...에메. 괜찮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에 밀리차는 에멜린을 일으켜 두 손을 잡는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차가움이 에멜린에게 전해지기를 그저 바라며.

 

"아버지가... 살아 있나 봐. 벨웨더에."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손 쓸 도리 없는 충격이었다. 장례까지 치른 이가 어떻게 살아 있단 말인가. 도스크볼 봉쇄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자퇴서를 제출하고 나이트마켓행 지상열차에 몸을 실었던 밀리차는 보았다. 빗줄기 속에서 행진하는 장례 행렬을. 식스타워즈의 스트랭포드 저택에서 시작하여 차터홀 남시가지, 북시가지를 돌아 브라이트스톤으로, 그리고 다시 식스타워즈로 이어지는 소박하지만 장엄한 행렬에 에멜린이 있었다. 그때 밀리차는 귀족 자제의 삶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혈연의 후광으로 명목 뿐인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제 또래의 아이에게 동정심을 느낄 여지는 없었다.

대성당이 붕괴되고 육신의 희열 교회 조직이 내부에서 썩어가는 것에 통쾌함마저 느끼고 있던 밀리차에게 스트랭포드 가의 이름은 새 시대가 완전히 잘라 버려야 할 구시대의 악습이었다. 그런데 그 새하얀 아이에게서는 베일로도 가려지지 않는 음울한 운명이 느껴졌다. 그것만은 밀리차 자신이 잘 아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에멜린의 말에 밀리차가 의문을 표하지 않은 채 믿은 것도 비단 친분과 신뢰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마치 바다가 포경선을 알아 파도를 일으키듯이, 하늘이 까마귀를 알아 활공을 돕듯이, 두 사람은 죽음의 농도와 속도를 알았다.

(밀리차가 유령학부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추론하면, 그것은 유령장 때문이다. 죽음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라면 유령에게 그것은 첫 번째로 알려지는 지식이다. 개개 유령이 제정신을 잃거나 미쳐버릴 때에도 유령장 전체는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숙련된 유령사만이 아는 유령장의 독특하고 미세한 떨림으로 나타난다. 즉, 밀리차와 에멜린은 유령장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과 패턴에 선천적으로 민감한 것이다.)

 

"네 말은 그러니까... 감령관이라는 거야?"

 

밀리차는 차마 '네 아버지가'라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지만 에멜린은 그 배려를 이해했다.

 

"...아마도. 지난 번에 검은 갑주를 마주쳤을 때, 내가 그 안이 텅 비어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해?"

"응, 나도 느꼈어. 그때는 어떤 악취미가 갑옷을 통째로 영틀로 만든 줄 알았는데..."

"아냐." 잠시의 침묵 뒤에 에멜린이 말을 이었다. "아냐, 갑옷 안에 사람이 있었어. 비어 있는 건 영혼 쪽..."

"..."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바다의 냄새가 났던 것 같아."

"바다?"

 

밀리차는 예상치 못한 단어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을 후회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레비아탄, 말하는 거지?"

"...거기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벨웨더에 네 '선배'와 내 아버지가 있다면..."

"안돼."

 

금속처럼 차갑게 식은 밀리차의 말이 에멜린의 주저를 끊었다. 에멜린은 고개를 들어 밀리차에게 젖은 두 눈을 보였고, 밀리차는 침착하게 다시 한 번 부정의 뜻을 밝혔다.

 

"안돼. 첫째로, 여기서 우리는 개인이 아니야. 조직 전체가 확실하게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움직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티모스를 만나러 가려 했던 건 그저 내 호기심일 뿐이었어. 무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에메."

"..." 에멜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둘째로, ...나는 널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설령 너 혼자가 아니라 우리 둘이 간다 해도 마찬가지야. 이길 수 없는 싸움은..."

 

밀리차는 자신이 발화한 마지막 단어에 움찔하며 말을 멈추었다. 밀리차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는 사람이었던가? 밀리차의 내면에서 피어난 그 의혹은 위로보다 빠르게 에멜린을 진정시켰다.

 

"밀리. 나, 아직 간다고 말 안 했어."

"...아. 미안해. 그러니까 나는..."

"아냐, 사과하지 마, 밀리." 에멜린은 짧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는 그저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어. 죽은 아버지의 망령이 집안 구석구석 스며들어서 미친 건 삼촌과 숙모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의심했을 때, 문득 책이 읽고 싶었어. 아버지의 서재에서 찾을 수 없던 책이라 가까운 대학 도서관을 방문해야 했지."

"그게 여기구나."

"응, 그리고 이건 얘기 안 했지?"

 

에멜린이 미소를 지었다. 긴장도 공포도 그 순간 만큼은 없었다.

 

"스코블란인 시인의 낡은 시집에 누가 장황한 메모를 끼워 넣어 두었더라고. 처음 봤을 때는 누가 정치경제학 과제를 깜빡하고 두고 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에멜린의 미소가 깊어지자 밀리차의 숨이 멈추었다.

 

"시집을 덮고 그 메모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느꼈어. '아, 이 글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하고. 그게 너와의 첫 만남이야, 밀리차." 식은 공기가 완전한 고요가 되었을 때 에멜린이 말했다.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이 전부가 아니야."

 

'아'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밀리차의 폐 속에 억눌려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그제서야 밀리차는 이 싸움의 의미를 이해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스크리브너스 가의 요새는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밀리차의 세계를 그 안에 가두어 버렸다. 오직 밀리차 자신만이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자신을 지탱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눈 앞에 있는 에멜린, 손에 잡히지 않는 '선배들.' 비록 자신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일 지라도.

밀리차는 자신의 차가움이 에멜린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에멜린의 따스함이 자신에게 생명의 불씨를 건네주는 것임을 알았다. 두 사람은 함께 성벽을 넘기로 하였고,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왔다.

 

*

 

일렁이는 수면에는 높은 건물의 일부였던 잔해만이 섬처럼 떠 있다. 하늘과 바다의 결합을 부정하는 지평선이 없어진 지금, 오직 별빛만이 번지는 무(無)의 공간만이 감각에 닿는 전부였다. 눈을 뜨는 것이 의미 없었기에 가까움과 멂을 몰랐고, 몸의 무게를 잊었기에 높음과 낮음을 몰랐다.

악마가 속삭였다. "그 이는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견디지 못하여 무너졌고, 스스로 무질서가 되어 결국 아무 것도 구해내지 못했다. 인간이여, 그대는 부서질 자신조차 잃었기에 물과 뭍의 질서를 원한다."

인간은 답하지 않았다.

악마가 다시 속삭였다. "그 이는 죽음이 흘러 넘치는 이 세계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를 사랑했기에 모순되었고, 결국 그렇게 얻어낸 목숨조차 남기지 못했다. 인간이여, 그대는 더 이상 삶을 바라지 않기에 장막 안과 밖의 질서를 원한다."

인간은 답하지 않았다.

악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부른 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나의 새로운 계약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인간은 껍질이 깨어진 초라한 마음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창백한 생명의 불꽃을 스스로 덮어 꺼뜨리며 말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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